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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 구병모 본문

책 리뷰

파과 - 구병모

웨일.K 2017. 3. 16. 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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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할머니와 킬러의 조합.

괴상한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소재는 더 괴상했다. 할머니 킬러의 이야기라니.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 두 단어의 조합과, 무슨 뜻인지 잘 짐작이 가지 않는 제목, 아가미를 읽고 나서 구병모 작가의 책을 읽어야겠다고 찾아보지 않았다면 아마 서가에서 고르지 않았을 것 같다. 소설의 줄거리를 쉽게 예상할 수 없는 조합이니까. 

파과(破果)는 흠집이 난 과실을 뜻한다. 작가가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냉장고에서 썩어가는 과일이었다고 하니, 이 뜻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될 듯 싶다. 파과는 파과지년(破瓜之年)의 준말이기도 하다. 파과지년의은 여자의 나이 16세, 혹은 남자의 나이 64세를 의미한다. 과(瓜,오이 과)자를 파자하면 팔이 두개가 되어 16이 되고, 같은 방법으로 파자하여 팔을 두번 곱하면 64가 되기 때문이라고.

책은 전체적으로 조각이라는 가명을 쓰는 할머니 킬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업계에서는 청부살인을 방역이라 부르며 킬러들은 스스로를 방역업자라고 부른다. 조각이 방역을 하는 과정, 그를 방해하는 다른 방역업자를 알아채고 조각의 사고가 재빠르게 돌아가는 장면들, 사건의 신속한 전개들 덕분에 꽤 속도감 있게 책을 읽어나갈 수 있다. 

그렇게 읽다보면 조각의 일을 몰래 지켜보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생각을 엿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이를 먹고 은퇴하기 직전의 한 노인의, 기억, 습관, 혹은 작은 가치관 같은 것들. 

그렇게 말했던 사람과, 함께 밥상을 나누고 머리카락에 싸락눈이 내려않는 평범한 일을, 그녀는 잠시나마 그려본 적이 있었다. 상대방이 코웃음칠까 두려워 입 밖으로 내어보지 못한 소박한 풍경과 오지 않을 나날을.

구병모작가의 글은 누구라도 한번쯤 품어보았을 생각으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데에 탁월한 것 같다. 인간은 절대 타인이 될 수 없기에 기본적으로 늘 관계에 두려움을 가진다. 누구나 한번쯤 상대방의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워, 상상만으로 그친 관계가 있지 않을까. 조각에게 스승인 류가 그렇듯. 

무언가를 하기로 생각하고 있다면, 설령 그것이 가벼운 인사일 뿐이라도, 언제나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 요즘 같아서는 더욱 그렇다. 돌아서면 곧바로 자기가 무엇을 하려했는지 잊을지도 모르니까. 그녀는 무용의 머리를 서너번 쓸어내리며 한 음절씩 확고하게 말한다.

"다녀, 온다."

무용은 조각이 키우는 개 이름이다. 무용(無用)이라니. 쓸 데가 없다는 이름을 지은 것 치고는 조각에게 다분히 의미가 있는 개라고 생각한다. 언제 어디서 데려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지만, 집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조각에게 조금의 위로는 되었을까.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

조각이 가진 방역업자로서의 마음가짐. 사실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일종의 족쇄이자 실낱같은 추억이 아니었을까.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말을 품게 되는 경우가 있다. 소중히 마음에 간직하다가 문득문득 떠올라 내 행동의 이유가 되어주는 말들. 


살아있는 것은 언젠가 사라진다

아무래도 주인공인 조각이 노인이기 때문인지,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전반에 깔려있다. 또한 조각이 사람을 방역한다는 직업 설정 때문에 더더욱 무게감이 짙다. 타인의 삶을 거두는 자이자 서서히 죽음에 다가가는 자로서의 조각은 어떻게 보면 죽음에 대해 초연한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무리 구조가 단단하고 성분이 단순명료하다 해도 사람의 영혼을 포함해서 자연히 삭아가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살아있는 것은 삭아간다는 말에는 본인도 포함되어있을 것이다. 그가 방역한 모든 사람들도, 방역을 청부한 자들의 영혼도, 방역을 하는자의 영혼도 차근차근 삭아왔다는 것, 모두 다를바가 없다는 말투에서 일종의 체념이 느껴지기도 하고, 어쩌면 사라져버리고 싶다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하나의 존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혼이라는 게 빠져나갔는 데도 육신이 더 무거워진다는 것은.

죽음을 대하는 조각의 말투는 덤덤하다. 그런 태도가 세월에서 오는 것인지, 직업에서 오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조각 특유의 차분함이 이야기 전반을 덮고있으며, 가끔 툭툭 내뱉는 말에서 그녀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혼이 육신에서 빠져나가면 육신이 더 무거워진다는, 이 모순되는 말에서 축 늘어진 무용의 모습이 연상되면서 글의 무게감이 더해진다. 

사라진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 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사라지지만 다만 한 번 쯤은 빛나는 순간을 가진다는 조각의 말은, 어쩌면 오랜 세월을 겪은 할머니의 말처럼 다가온다. 그러니 삶이 마냥 덧없는 것은 아니야. 하고 보듬어주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다 읽고 나서 기분이 묘했다. 할머니의 전투씬이라던가, 회사의 모양을 하고 있는 살인청부업이라던가, 그들이 쓰는 가명이라던가하는 것이 모두 기묘해서 꿈을 꾼 것 같았다. 물론 아가미에서도 느꼈지만 구병모작가의 책들은 소재가 참 대단한 느낌이다. 독특한 소재 가운데 삶과 죽음에 대해서 늘어놓는 이야기들이 잔잔하게 물처럼 밀려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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